성경과 묵상

개신교회의 정체성

K.S.Lee 2011. 11. 3. 12:00

지난주 종교개혁 주일을 보내면서 중세의 카톨릭의 실상과 칼빈,

쯔뱅글리, 루터 등 당시의 카톨릭 사제를 중심으로 일어난

종교개혁운동의 배경을 목사님 설교를 되세겨 보면

기존의 잘못된 질서와 관행을 하나님 말씀중심으로 돌아가자는

취지의 개혁운동이라 생각된다.

 

그런데 최근 종교관련 여론조사기관에 의하면 한국의 개신교에 대한

일반 시민의 비판은 익히 짐작이 가는대로 최악의 상황이고 그 중심에는

타종교에 대한 배타성은 물론 한걸음 더 나아가 공격성을 지적하고 있다.

 

사실 많은 개신교회 또는 선교단체에서는 성경의 전체의 흐름은

간과한채 자기집단의 생각과 부합되는 일부만을 인용하여 타종교와 일부

정부시책에 대한 공격성을 멈추지 않고 있음을 목격하게 될때 안타까움을

느낄때가 있다.

 

첫번째 공격성과 관련한 예로서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한 후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통해 가나안 복지로 인도하실때 대적하게 되는 여리고성,

아이성 등은 정복할 대상이 아니라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는 과정에서

대적하게 됨에 따라 정복해야 하는 대상에 불과할 뿐일찐데 일부

선교단체에서는 우상을 숭배하는 타종교 시설이라 하여 사찰을 공격의

대상(목적)으로 여기고 여리고성 땅밟기를 통해 사찰이 와르르

무너지기를 기도하는 일이 발생했고 급기야 사과하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그렇다면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에돔족, 즉 에서의 자손을 만나거든

비록 하나님이 택한 백성은 아니나 하나님께서 풍성한 땅을 기업으로

내려준 족속으로 너희 형제의 자손이므로 치지 말라고 지시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할때 단순히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는 관점에서

이웃과의 화평은 뒤로하고 타종교를 공격의 목적으로 삼아서야...

 

둘째로 일부 선교단체에서는 온 유대와 사마리아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는 말씀을 선교사명의 근거로 정부의 외교적 우려에 따른

자제 지침에 아랑곳하지 않고 아프칸이나 중동지역에서 공세적

선교활동을 하면서 유발되는 인질화 내지 처형 또는 외교적 분쟁이

발생되기도 했다.

문제는 선교적 사명을 감당하는 접근적 방법론의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때 국내에서 흔히 목격했던 노방전도, 더 나아가 혼잡한 길거리에서

마이크 들고 외치는 전도로 인해 행인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던일,

지폐에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이라는 도장을 찍어 화폐를 훼손했던 일,

또 국외에서는 평화 대행진이라고 대 규모 행사로 포장하고 실제는

내용과 달리 선교할동으로 물의를 일으킨 일...

단순한 종교강요는 반발을 일으키고 있음에 비추어

우리나라 개화기의 선교사들은 병원과 학교를 지어 사회에 긍적적으로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한 결과가 있었고 최근 "톤즈야 울지마"로

잘 알려진 고 이태석 신부는 전쟁과 기아에 시달리고 있는 남수단에

학교와 병원을 세우고 학생들에게 희망을 심어준 이야기는 종교를 떠나

우리 국민 모두의 마음을 촉촉히 젖게 했었는데 현재 우리 개신교는?

 

타 종교를 공격하거나 배척하거나 비난하기 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오늘의 상황하에서 개신교회의 정체성과 선교의

방향성을 되집어 봐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런지...